이렇게 글도 쓰지만, 스타일리스트로서 누군가에게 옷을 입히기도 한다.
몇 년 전, 촬영을 위해 한 기업의 대표를 스타일링했다. 주식시장이 요동치는 요즘에도 시가총액 10위권 내에 굳건히 머물고 있는 기업의 대표라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그 대표의 감각이 상당함을 알고 있었기에 마냥 가벼운 마음만으로 임할 순 없었다. 신경을 곤두세웠고, 열과 성을 다했다.
혹시나 이렇게 입는 게 괜찮을까요?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청산유수로 그를 설복시킬 패션사적 근거와 스타일링의 이유를 머릿속에 그리기까지 했다. 이게 또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 섀도 복싱 하듯 혼자 되뇌기까지 했다.
그런데 촬영 시작과 동시에 기우임을 깨닫게 됐다. 대표는 친절했고, 본인의 의사는 완곡히 표현하면서, 내 의도를 한껏 존중해줬다. 촬영은 좋게 마무리됐지만, 모든 게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결정적 패착이 하나 있었다. 대표가 리지드 인디고 데님 그러니까 생지 데님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현장에서 알게 된 것이다.
Selvedge Jeans
Styling
난 생지 데님을 좋아한다. 데님은 시간과 함께 더 특별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생지 데님은 더더욱 그렇다. 내 몸의 형태, 내 삶의 방식, 그리고 워싱 방법 및 횟수에 따라 나에게 최적화된 형태로 변형되고, 완성된다. 나와 시간을 함께하며 유일무이한 데님 팬츠가 완성되니, 특별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고 장황하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일차원적이었다.
“아… 이 셀비지 생지 데님이 재킷하고
제일 잘 어울리는데…”
누군가를 설득하기엔 합당치 않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절실히 안다.
내 말이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주변 지원군과 대표의 관대함으로 결국 내가 준비한 생지 데님을 입고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며칠 뒤, 생지 데님을 입어본 후 맘에 들어 했다는 긍정적인 후기를 들었다. 누군가가 꽤 오래 고집했던 취향을 내가 바꿔놓았다는 것도 기뻤지만, 셀비지 원단으로 완성된 생지 데님의 매력을 체득하게 했다는 것이 더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