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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PRING
글/ 이민경 (책 <도쿄 큐레이션> 작가, 콘텐츠 디렉터)
우리를 스스로 빛나게 해줄 패션계의 든든한 신 스틸러(Scene stealer).
바야흐로 카디건 입기 좋은 계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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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진 정리를 하다가 내가 화이트 티셔츠 못지 않게 자주 입는 아이템이 카디건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6년 동안 살았던 일본 생활을 통틀어 유니폼 마냥 즐겨 입은 카디건은 오트밀 컬러의 캐시미어 카디건이었다. 평소에는 주로 화이트 티셔츠 위에 입거나 트레이닝 조거 팬츠에 캐주얼하게 매치했고, 환절기엔 트렌치코트나 울 코트 위에 무심한듯 두르기도, 바람이 매서운 날엔 돌돌 말아 머플러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입고 있다.
그토록 많이 입었건만 나는 왜 그간 눈치채지 못한 걸까. 생각해보면 카디건은 애초에 패션계의 고요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우리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속성 답게 태생적으로도 정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태어났다. 1853년 크림전쟁 때, 병사들이 두꺼운 스웨터를 입은 채 상처를 치료하기 어려워지자 당시 카디건 백작이 칼라가 없고 앞섶을 튼 스웨터를 입혀 오염된 옷을 쉽게 갈아입을 수 있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카디건의 시작이었다. 이후 백작의 귀족적인 이미지와 따뜻하면서도 실용적인 기능이 더해져 카디건은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전천후 아이템이 된 것이다.
카디건 백작 (James Brudenell, 7th Earl of Cardig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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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내게 카디건은 조직에서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지만 제 몫을 성실히 다 하는 사람처럼, 스스로 요란한 빛을 내지는 않지만 우리의 일상이 빛나도록 도와주는 아이템이다. 영화 <블루 재스민>에서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이 몸에 꼭 맞는 원피스 위에 짧은 카디건을 입어 귀족적인 멋을 드러내기도 했고, 드라마 <가십걸> 에서 ‘블레어’가 고급스러운 업타운 걸 스타일링을 연출할 때 빠지지 않았으며, 실제로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화이트 셔츠 위에 걸치거나 셋업으로도 즐겨 입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신기하게도 카디건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입는 사람의 분위기를 여유롭고 멋스럽게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존재다.

그 뿐인가. 계절과 계절 사이, 아슬아슬한 날씨의 문턱을 넘을 때 우리가 얼마나 카디건에 기댔는지 떠올려보면, 그것의 진가는 실은 보이프렌드 재킷 이상으로 든든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서둘러 떠난 여행길에서도,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던 늦은 밤에도 나만의 스타일을 무심한 듯 시크하게 완성시켜 주었으니. 잘 고른 카디건 하나가 알게 모르게 패션의 신 스틸러(Scene stealer) 역할을 했던 셈이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 카디건이 트렌드의 중심에 올라서기도 했다. 크롭트 카디건을 마치 아우터처럼 섹시하게 연출하는 헤일리 비버와 켄달 제너의 룩이 연일 화제가 됐고, 제니가 타이트한 톱이나 원피스 위에 즐겨 입는 사랑스러운 카디건 룩도 대히트를 쳤으니까.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Y2K 트렌드에 카디건이 한 몫을 한 것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단언컨대 이 모든 유행이 지나가더라도 카디건은 남을 것이다. 그것이 질기고 긴 카디건의 생명력이라면 생명력이다.
다가오는 봄 쇼핑을 앞두고 제일 먼저 눈길이 간 것은 유니클로의 다채로운 카디건 시리즈. 무엇보다 봄에 어울리는 경쾌한 컬러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면과 모달 소재의 혼방이라 몸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고 무엇보다 가벼워서 좋았다. 가볍다는 건 환절기에 여러 겹 껴입어도 부담이 없다는 얘기. 특히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 카디건이라 여름까지 입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제 피부 보호까지 가능한 카디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름에도 편하게 물세탁을 할 수 있는 부분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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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는 깨끗한 스트레이트 핏의 데님 진에 옐로우 빛의 크루넥 카디건을 매치하고 진주 목걸이를 더해 클래식하게 연출하고 싶다. 주말에는 심플한 화이트 코튼 드레스에 블루 V넥 쇼트 카디건으로 허리를 묶고 베이스볼 캡과 스니커즈를 매치해도 좋을 것 같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긴 데님 스커트를 입을 때는 선명한 그린 컬러의 저지 크루넥 카디건이 잘 어울릴 듯. 시선을 위로 올리고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도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 추천하고 싶다. 색이 다른 카디건 두 피스를 레이어링 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카디건 하나는 단추의 중간을 잠궈 입고, 또다른 카디건은 어깨 위로 걸치고 목 뒤로 넘겨 스카프처럼 연출하는 식. 카디건은 단추를 어떻게 오픈하느냐, 그리고 어깨의 어느 부분에 걸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클래식한 옷은 트렌드도 계절도 타지 않는 법.
우리를 스스로 빛나게 해줄 카디건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바야흐로 카디건 입기 좋은 날이 곧 다가온다.